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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발이 없대..(엄마의 꽃밭)

솜 사 탕 2009. 11. 8. 14:04
    엄마의 꽃밭 아빠는 심한 몸살에 몸이 아파서 온종일 방안에만 누워 있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경수는 아빠 대신 엄마가 장사하는 것이 싫었다. 학교에 갔다 오면 엄마가 없는 집은 텅 비어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 날이면 경수는 한참을 걸어 엄마가 어묵 장사를 하는 곳까지 갔다. "오늘은 왜 또 왔어? 날도 추운데." "엄마보고 싶으니까 왔지, 뭐." "밤에 들어갈 텐데, 그때까지도 못 참아?" "밤 되려면 아직 멀었잖아." "밥은 먹었니?" "으응." 처녀시절 유치원에서 일을 했던 경수 엄마는 언제나 다정다감했다. 경수는 김이 하얗게 피어오르는 어묵 국물 통 앞에 앉아 조그만 얼굴을 엄마 어깨에 기대고 있었다. 그때 할머니 한 분이 다가왔다. 할머니가 입고 있는 외투 앞자락에는 손바닥만하게 불에 눌은 자국이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가 끌고 온 망가진 유모차 위에는 펼쳐진 종이상자가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하나에 얼마유?" "오백 원인데요, 할머니." 할머니는 잠시 망설이더니 어묵이 달린 꼬치 하나를 집어들었다. 김이 무럭 무럭 나는 어묵을 입으로 호호 불었다. "칠십이 넘으니까 이가 다 빠져서 음식 먹기가 너무 곤욕스러워." "연세에 비해서 정정하시네요. 힘든 일까지 하시니 말예요." "정정하긴, 뭐. 같이 있는 할망구들 과자 값이라도 벌라고 허는 일이지. 저 아래 '덕성 사랑의 집'에 있거든. 근데 할망구들이 다들 허리 아프고, 다리 아프다고 거동들을 못 해." "네." "근데, 이게 얼마라구 했지?" "오백 원이요, 할머니." "나이 먹으니까 입에 들어가는 게 다 까마귀 고기가 되는가벼. 들어도 금방 까먹고, 다시 들어도 금방 까먹고. 이러다 나중엔 내 이름도 까먹겄어." 할머니는 허탈하게 웃다 말고 다시 어묵 꼬치 하나를 집어들었다. "오늘 점심은 이걸로 해야겄네. 저 윗동네까지 다 돌아야 허니까." "네 시가 다 돼 가는데 점심도 못 드셨어요?" "이 일 하다 보면 때 거르는 건 예산걸, 뭐." "국물하고 천천히 드세요." 경수 엄마는 할머니 앞에 있는 종이컵에다 다시 따뜻한 국물을 퍼주었다. 할머니는 두 개밖에 남지 않은 앞니로 조심스럽게 어묵을 베어 물었다. 그리고 꼭 탱크가 기어가는 모양으로 입을 오물거렸다. "아까, 얼마라 그랬지? 또 잊어버렸네, 또 잊어버렸어." 할머니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웃고 있었다. 경수 엄마도 할머니를 따라 웃었다. "할머니, 정말로 잘 잊어버리시네요. 벌써 세 번이나 물어 보셨잖아요." "글쎄 내가 그렇다니까." "그럼 아까 전에 돈주신 것도 잊으셨어요? 아까 천 원 주셨잖아요. 오뎅 두 개째 드실 때요." "응? 내가 벌써 돈을 줬다구?" "네. 주셨어요. 이거 보세요." 경수 엄마는 앞 주머니에 있는 천 원 짜리 까지 꺼내 보이며 말했다. "난, 통 기억이 안 나는데. 내가 줬나." "경수야. 할머니 아까 전에 돈 주셨지, 그치?" "응? 응." 경수는 엄마의 물음에 얼떨결에 그렇게 대답했다. 할머니는 낡은 유모차를 끌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걸어갔다. 힘겹게 유모차를 밀고 가는 할머니 어깨위로 햇살 한 줌이 투명한 손을 얹었다. 할머니를 바라보는 경수 엄마의 눈가엔 어느새 물빛 무늬가 새겨졌다. 그 무늬의 실루엣 속에서 아름다움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엄마, 저 할머니한테 돈 안 받았잖아, 그치?" "돈을 안 받은 게 아니라, 그냥 대접 해드린 거야." "엄마는 지난번에도 집 없는 아저씨한테 오뎅 그냥 줬잖아. 엄마는 그런 사람들이 불쌍해서 그러는 거야?" "불쌍해서 그러는 건 아니구,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을 사랑해야 하잖아." "우리 선생님이 그러셨는데, 이웃들을 사랑하는 건 훌륭한 일이라고 했어." "엄마는 우리 경수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 경수는 알았다는 듯 엄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경수야, 사랑은 발이 없대. 그래서 안아 주지 않으면 혼자서는 한 발자국도 걸어갈 수가 없대. 할머니는 친구들 과자 사주려고 점심도 못 드시고 일하신다고 하잖아. 우리 경수가 조금 터 크면 엄마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거야." 경수는 엄마가 해준 말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파란 하늘에 몸빛을 헹구어낸 겨울햇살이 경수가 바라보는 땅 위를 내리쬐고 있었다. 경수는 동그랗게 등이 굽은 할머니의 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할머니가 무당벌레처럼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로 날아오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수는 국물통에서 하얗게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보며 엄마가 해준 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사랑은 발이 없대. 그래서 안아주지 않으면 혼자서는 한 발자국도 걸어갈 수 없는 거래...' (좋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