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와 북한의 핵실험 사태가 대한민국을 강타한 지금, 오체투지로 통일로를 지나고 있는 문규현 신부의 소회가 남다르다. 문 신부는 지난 1989년 임수경 씨와 함께 처음으로 북한땅을 밟은 첫 민간인. 노 전 대통령은 지난 2007년 사상 최초로 육로를 통해 방북한 대통령이었다. 증폭되는 한반도 위기와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접한 문 신부가 안타까운 심경으로 <프레시안>에 글을 보내왔다. 2008년 9월 4일부터 시작된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 오체투지 순례단의 여정은 2009년 5월 27일 통일로를 지났다. <편집자> |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형언키 어려운 애통함과 안타까움으로 여기 통일로에 엎드립니다. 남북 간 대결과 긴장이 극단으로 치닫는 어둡고 슬픈 현실 속에 여기 통일로에 엎드립니다. 우리 사회와 한반도가 앓고 있는 '반인간 반생명 반평화'라는 이 병이 얼마나 중하고 깊으며 얼마나 막다른 골목에 와있는지, 충격적이고 비극적인 사건들이 연이어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체투지 기도순례가 거의 마무리되어가는 지금, 자갈밭을 끌어안고 가시밭길 위를 뒹구는 듯 그 어느 때보다도 아프고 고통스럽습니다.
"분단의 설움으로 45년을 지낸 오늘 이 시간, 이 분단을 넘고자 합니다. 이 비극의 자리를 당신은 보고 계시죠. 우리 사천만 동포들의 아픔을 당신은 알고 계시죠. 이 아픔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우리는 이 장벽을 우리의 작은 몸으로라도 무너뜨리고 싶습니다."
1989년 8월 15일, 그날 판문점 남북경계선에 서서 울먹이며 바친 기도입니다. 임수경 학생의 손을 잡고 남으로 넘어서기 직전 바친 그 기도가 20년이란 세월이 흐른 오늘 이 시간에 우리가 다시 드려야 하는 기도처럼 절박합니다.
분단 이후 민간인으로선 처음으로 판문점을 넘어선 지 20주년 되었습니다. 참으로 무모하고 어리석게만 보이던 몸짓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에게 냉전과 분단은 허물어질 수 있음을, 녹이고 또 녹이면 녹지 않을 장벽도 쇠붙이도 없음을 확신시켜주기도 했습니다. 그 뒤 지난 20여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오체투지 하듯 판문점과 남북을 오가며 소통의 길을 만들고 공존의 방식을 구해왔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갖고 6.15와 10.4 공동선언문을 발표하는 역사적 순간엔 참으로 가슴 벅찼습니다. 남북화해와 상생의 통일로가 활짝 열리고 닦이는 시대를 지켜보며 평생 소망이 이뤄지는 듯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그렇기에 종교인으로서 또 민족의 통일을 열망하는 한 국민으로서, 분단장벽을 허물고 민족부활의 제단 위에 작은 희생제물이 되었음은 진실로 영광이었습니다.
▲ 문규현 신부가 오체투지 중 휴식을 취하고 있다. ⓒ오체투지 순례단 |
"숱하게 노력하고 헌신하며 쌓은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간 수많은 이들이 숱하게 노력하고 헌신하며 차곡차곡 쌓아온 온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허망하게 무너지고 있습니다. 용산 세입자들이 살아보겠다고 망루에 올라있다 불타 죽어간 것처럼, 민주주의도 민족통일의 망루도 그렇게 탐욕과 분열, 반생명과 반평화를 일삼는 이들에 의해 불태워지고 있습니다. 남북화해와 통일의 길을 계속 다져가고자 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가 이룬 일체의 성과를 부정하고 존재 자체조차 모욕하던 세력에 의해 '정치적 타살'까지 당했습니다. 내리꽂히는 햇볕과 달궈진 아스팔트 열기 때문이 아니라, 약육강식과 야만, 잔인함과 적의로 팽배한 우리 현실이 던지는 아픔 때문에 제 몸도 마음도 그냥 타버리는 것 같습니다.
남북 민족의 산하에는 단절이 없습니다. 지리산을 출발하여 계룡산을 지나며 우리가 만나온 저 산맥과 강들은 북이기도 하고 남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절하고 기도하며 지나온 저 수많은 큰길 작은 길들은 남으로도 오고 북으로도 이어져있습니다. 노고단에서 이곳 통일로에 이르기까지 가을과 겨울, 봄과 여름, 사계절을 만나고 보냈습니다. 말 그대로 풍찬노숙 여정이었습니다. 어느 경우에도 순리를 거스를 수 없었습니다. 비 내리면 비 내리는 대로, 바람 불면 바람 부는 대로, 땡볕이 쏟아지면 쏟아지는 대로, 계절이 바뀌면 바뀌는 대로 우리 자신을 맡겨야 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지혜를 찾고 도리를 구하며, 인내하고 포기하지 않는 마음을 키워가는 것 그뿐이었습니다. 가야할 길을 가고 진리를 구하며 희망을 키워가는 것 그뿐이었습니다.
▲오체투지 순례단 ⓒ프레시안 |
남북 민족이 가야할 길도 그렇습니다. 갈라진 민족은 자꾸 만나야 하고 막힌 곳은 풀어야 함이 순리입니다. 대결은 약화시키고 갈등은 다스리며, 공존과 상생의 길을 구해야 함이 순리입니다. 대립과 분열은 남북 누구에게든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적 타산으로도 결코 이익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분이 제 블로그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오체투지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딸이 포스터 그리기 숙제가 있다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주제는 '통일'. 아이는 인공기와 태극기를 적당히 섞어 새로운 국기를 만들고 그 아래에 이렇게 써 넣었습니다. '곧 태어날 우리 국기'…" 분단이후 65년이 되도록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있지 못하는 우리 어른들은 한없이 부끄럽고 미안해해야 합니다. 죽임과 증오의 정치만을 양산하며 아이들의 미래와 희망을 부러뜨리는 정치인들, 권력자들은 참회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마음을 모으면 견우직녀 오작교처럼 위대한 전설을 이뤄낼수 있습니다"
여전히 저는 20년 전이나 다를 바 없이 미련하고 바보스럽게 길 위에 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한 배 한 배 정성을 다하며, 뚝뚝 떨어지는 땀 한 방울 한 방울에조차 민족의 화해와 하나됨의 염원을 담아 이 길 위에 있습니다.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그토록 절절히 기도하신 것처럼, 20년 전 판문점에 섰던 그날 그 순간처럼, 다시금 온 정성과 온 마음으로 이 통일의 길, 민족의 길, 화해의 길에 엎드리고 있습니다.
▲ 오체투지 하루 일정을 마치고 기도를 드리고 있는 문규현 신부 ⓒ프레시안 |
억압과 독선, 파괴와 불통의 정치가 이 사회와 한반도를 시커멓게 뒤덮고 있는 절망의 시간이기에 우리는 더욱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수많은 까치 까마귀들이 자신을 희생하고 봉헌하여 만든 오작교 위에서 견우직녀가 만나듯이, 우리의 기도순례자들 또한 감히 이 시대 민족의 화해와 평화의 오작교 되기를 자청합니다. 물 한 방울 한 방울이 수없이 떨어지기를 반복하면 바위도 뚫습니다. 실개천이 모이고 또 모이면 장강대하를 이룹니다. 소수로는 통일의 오작교를 세울 수 없습니다. 허나 마음을 모으고 또 모으면 우리도 견우직녀 오작교처럼 아름답고 위대한 전설을 이뤄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로 남북 사이에 소통과 만남의 오작교 하나 다시금 이어갈 수만 있다면 이 팍팍하고 시커먼 아스팔트 분진도 다 마셔버리겠고, 남북 사이에 상생과 공존의 오작교 하나 다시금 더할 수만 있다면 한 줌 흙가루가 되도록 이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절하고 또 절하겠습니다.
민족화해와 통일의 벗이었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그리고 남북통일의 여정에 희생한 모든 이들의 고귀한 삶과 뜻이 변함없이 이어지길 기도합니다. 남북 위정자들이 진심으로 가슴을 열고 서로를 존중하며 자신을 조금씩만 낮추어 그 길을 찾고 지켜갈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남북관계에도, 북을 대하고 남을 대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에도 사랑과 자비의 기운이 가득 채워지기를 기도합니다. '곧 태어날 우리 국기'라고 그린 아이의 미래, 희망을 향해 저마다 자기 삶을 깊이 성찰하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속 장벽과 미움부터 비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 마음속 불신과 냉담부터 내려놓기를, 우리 마음속 장벽과 미움부터 비울 수 있기를, 그렇게 정화된 자리에 민족적 신뢰와 우정이 튼튼하게 뿌리내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불어 살고 함께 희망을 일구고자 하는 민족의 의지와 연대감이 촛불로 들불로 횃불로 피어오르길 기도합니다. 많은 이들의 마음이 어느 때보다 무척 어렵고 힘든 이 시기, 우리 자신이 먼저 생명이고 평화 되기를 소망하며 낮춤과 비움, 존엄과 섬김의 길을 구합니다. 위로와 치유 있기를, 용기와 화해 있기를, 선함과 정의가 깊숙이 뿌리내리기를 간청합니다. 진정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이 모든 마음, 모든 곳에 열리고 다져지기를 염원합니다.
20년 전 판문점에서 서서 외로이 드렸던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를 이제 이 시대 더 많은 평화의 사도들과 함께 다시금 간절하게, 간절하게 바칩니다.
주님,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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